순천 옥천서원,
유배지에서 피어난 학덕의 자리
무오사화로 순천에 온 김굉필을 기리며 세운 전라도 첫 사액서원
순천이라고 하면 순천만습지나 국가정원을 먼저 떠올리시는 분들이 많은데, 조선시대의 순천은 조금 다른 이미지로도 알려져 있어요. 임금의 눈 밖에 난 학자들이 유배 와서 머물던 고을이기도 했거든요. 오늘 소개해드릴 옥천서원은 그런 유배객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한훤당 김굉필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곳이에요.
제가 자료를 찾아보니 이름이 몇 번이나 바뀌고, 화재로 사라졌다가 다시 세워지기까지 사연이 꽤 깊더라고요. 그 흐름을 하나씩 따라가 볼게요.
무오사화에 연루되어 순천까지 흘러온 김굉필
김굉필은 조선 초기의 학자로, 어린 시절부터 김종직의 문하에서 학문을 배우고 훗날 형조좌랑까지 지낸 인물이라고 해요. 그런데 연산군 4년(1498)에 일어난 무오사화 때 스승인 김종직의 사초 문제로 그 일파로 몰리면서 하루아침에 처지가 뒤바뀌고 말았어요. 무오사화는 김종직이 쓴 글을 트집 잡아 사림 세력을 대거 숙청한 사건으로, 조선 전기 4대 사화 가운데 첫 사건으로 꼽힌다고 알려져 있죠.
이 일로 김굉필은 평안도 희천으로 유배를 떠나야 했어요.
그렇게 시작된 유배 생활은 순천으로 이어졌어요. 희천에 있던 김굉필이 다시 순천으로 이배되었고, 결국 이곳에서 갑자사화 때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고 해요. 타지에서 맞은 안타까운 죽음이었지만, 그의 학덕을 기억하는 이들은 적지 않았던 모양이에요.
훗날 순천 지역 유림들이 김굉필이 마지막을 보낸 이 고을에 그를 기리는 공간을 마련하기로 뜻을 모았고, 그 결실이 바로 옥천서원이에요.
경현당에서 옥천정사로, 그리고 사액서원으로
옥천서원이 처음부터 지금의 이름으로 불린 건 아니었어요. 명종 19년(1564)에 당시 순천부사였던 이정이 처음 이 자리에 사당 겸 강학 공간을 세우면서 '경현당'이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해요. 그리고 이듬해인 명종 20년(1565)에 김굉필의 신위를 모실 사당을 별도로 지으면서 '옥천정사'라는 이름으로 다시 불리게 됐고요.
이름이 두 번이나 바뀐 걸 보면, 공간의 성격이 강학 중심에서 제향까지 아우르는 쪽으로 점차 확장돼 갔다는 걸 짐작해볼 수 있어요.
결정적인 전환점은 선조 1년(1568)에 찾아왔어요. 당시 순천부사였던 김계가 조정에 상소를 올린 결과, 옥천서원은 전라도에서는 처음으로 임금에게 이름을 하사받는 '사액서원'이 되었다고 해요. 사액서원이 된다는 건 나라에서 서원의 이름을 지어 현판과 함께 내려주고 그 격을 공식적으로 인정한다는 뜻이라, 조선시대 서원 중에서도 상당히 명예로운 자리로 여겨졌다고 해요.
전라도 첫 사액서원이라는 타이틀이 옥천서원에 걸린 배경이 바로 이거예요.
정유재란의 화재를 딛고 다시 세워진 자리
옥천서원도 전란의 화마를 피해 가지는 못했어요. 정유재란 때 불이 나면서 건물이 모두 소실되는 아픔을 겪었다고 해요. 이후 흥선대원군이 전국 서원을 대대적으로 정리한 서원철폐령(고종 5년, 1868) 시기에도 옥천서원은 당시 전국에 남아 있던 47개 사액서원 가운데 하나로 꼽히며 훼철을 면했다고 전해져요.
여러 차례 고비를 넘긴 셈이죠.
화재로 사라졌던 건물은 한참 뒤인 1928년에야 유림들의 힘으로 다시 세워졌다고 해요. 지역 유림들이 뜻을 모아 옛터에 서원을 복설한 결과가 지금 우리가 볼 수 있는 옥천서원의 모습인 거죠. 수백 년의 시차를 두고도 김굉필을 기리려는 마음이 이어져 온 걸 보면, 이 서원이 순천 사람들에게 어떤 의미였는지 조금은 알 것 같아요.
사우와 경현당, 강학과 제향이 함께 있는 공간
경내에는 여러 건물이 자리하고 있어요. 김굉필의 위패를 모신 3칸 규모의 사우가 중심이고, 그 앞으로 강당인 경현당(4칸)이 있어요. 경현당은 가운데 마루를 두고 양쪽에 협실을 낸 구조로, 서원의 각종 행사는 물론 유림들의 회합과 학문 강론 장소로 쓰였다고 해요.
지금도 이 공간은 서원의 얼굴 같은 역할을 하고 있을 거예요.
경현당 곁으로는 유생들이 머물던 지도재와 의인재(각 4칸)가 동재와 서재로 나뉘어 자리하고, 제사에 쓸 음식을 마련해두던 전사청(1칸)도 남아 있어요. 여기에 내삼문과 외삼문, 관리인이 머물던 고직사(4칸)까지 갖추고 있어서, 규모가 크지 않아도 서원으로서 갖출 건 다 갖춘 구성이라고 할 수 있어요.
이름이 세 번 바뀌고, 불에 타 사라졌다가 다시 세워진 자리 — 옥천서원은 그렇게 순천의 시간을 품고 있어요.
순천향교와 나란히, 골목길 속 서원
옥천서원의 재미있는 점은 위치예요. 순천향교와 직선거리로 240m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데다, 지금은 주택가 골목길 안쪽에 자리하고 있거든요. 조선시대 교육·제향 공간이 현대 주거지 한복판에 남아 있는 모습이라, 전통과 현대가 만나는 진풍경을 이룬다는 평가를 받는다고 해요.
옛 서원 건물 담장 너머로 바로 이웃집 지붕이 보이는 풍경, 상상만 해도 독특하죠.
가까운 순천향교와 함께 둘러보시면 조선시대 순천의 교육·제향 문화를 한 번에 살펴보는 코스가 될 수 있어요. 두 곳 다 골목길 안쪽에 있는 만큼, 차보다는 도보로 천천히 걸으며 옛 담장과 기와지붕을 눈에 담아보시는 걸 추천해요.
순천에는 옥천서원 말고도 유배 온 학자나 그 후손을 기리는 서원이 여러 곳 남아 있다고 해요. 조선시대 순천이 정치적으로 밀려난 이들의 유배지였던 만큼, 그 흔적이 서원이라는 형태로 곳곳에 남아 있는 셈이죠. 옥천서원을 시작으로 순천 곳곳의 서원을 하나씩 찾아보는 것도 이 도시를 알아가는 좋은 방법이 될 것 같아요.
골목길 안쪽에 조용히 앉은 서원, 순천향교와 함께 걸어보시면 옛 순천의 결이 더 선명하게 느껴질 거예요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