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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ot Light강진 웹진 · 강진 인사이드 · 2026-10-06 · 읽는 시간 7분

오현의 학문을 기리는 강진 수암서원

인조 2년 세워진 뒤 철폐와 복원을 거친 강진 서원 이야기

오현의 학문을 기리는 강진 수암서원
강진 현지 사진

수암서원은 이선제, 이조원, 이중호, 이발, 이길 다섯 분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서원이에요. 이름만 보면 지나치기 쉽지만, 조선 전기부터 이어진 한 집안의 학문적 발자취가 고스란히 담긴 공간이라 천천히 둘러볼 만해요. 오늘은 전남 강진에 있는 이 서원이 어떤 사연으로 세워졌고, 지금은 어떤 모습으로 남아 있는지 함께 짚어볼게요.

수암서원은 어디에, 왜 세워졌을까요

수암서원
수암서원

수암서원은 전남 강진군 성전면 동령길 51에 자리하고 있어요. 강진군은 전남 서남부에 있는 고장이고, 성전면은 그 안에 속한 여러 면 가운데 하나예요. 처음 찾아가는 길이라면 내비게이션에 정확한 주소를 입력해두고 출발하는 게 헷갈리지 않는 방법이에요.

분류상으로는 관광지로 등록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조선시대 서원의 모습을 간직한 유서 깊은 공간이라고 보면 돼요.

수암서원이 세워진 이유는 분명해요. 이선제, 이조원, 이중호, 이발, 이길 이렇게 다섯 분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조선 인조 2년, 즉 1624년에 세워졌거든요. 다섯 분 모두 한 집안에서 이어진 인물들로, 학문을 닦고 벼슬길에 나섰던 자취를 기리자는 뜻이 담겨 있어요.

이렇게 한 집안의 여러 인물을 함께 추모하는 서원은 지역의 역사를 이해하는 데에도 좋은 실마리가 되어줘요.

서원은 조선시대에 학문을 가르치고 선현을 기리던 교육 시설이자 제사 공간이었다는 건 많이들 알고 계실 거예요. 수암서원도 크게 다르지 않아서, 추모의 기능과 교육의 기능을 함께 품고 있던 곳이었어요. 그래서 서원 안에 사당과 강당이 함께 자리하고 있는 거고요.

다음에서는 이 다섯 분이 구체적으로 어떤 분들이었는지 조금 더 들어가 볼게요.

1624수암서원이 세워진 해(인조 2년)

이 숫자 하나만 기억해두어도, 수암서원이 조선 전기부터 후기까지 꽤 오랜 시간을 건너온 공간이라는 감이 잡힐 거예요. 이제 이름이 나왔던 다섯 분이 각각 어떤 발자취를 남겼는지 살펴볼게요.

이선제와 네 분의 후손, 어떤 발자취를 남겼을까요

수암서원
수암서원

수암서원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인물은 이선제예요. 생몰년은 정확히 전해지지 않지만,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호조참판과 예문관제학 등의 벼슬을 지낸 분이라고 해요. 호조참판은 나라의 재정을 다루는 자리였고, 예문관제학은 학문과 문서를 다루는 자리였으니, 실무와 학문 양쪽에서 두루 역할을 했던 인물이라고 볼 수 있어요.

이런 경력 덕분에 후대에도 학문을 상징하는 인물로 기억된 것으로 보여요.

이선제의 발자취 가운데 특히 눈에 띄는 건 「세종실록」 편찬에 참여했다는 점이에요. 조선왕조의 공식 기록을 정리하는 일에 이름을 올렸다는 건 그만큼 학문적 신뢰를 받았다는 뜻이기도 해요. 여기에 더해 「고려사」 가운데 사실과 다르게 적힌 부분을 고쳐서 다시 편찬하는 작업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고 전해져요.

역사 기록을 바로잡는 일에 이름을 남긴 인물이라는 점에서, 수암서원이 그를 중심에 두고 다른 네 분을 함께 모신 이유가 짐작이 돼요.

이조원, 이중호, 이발, 이길 네 분은 모두 이선제의 자손으로, 각자 여러 벼슬을 지낸 분들이에요. 한 집안에서 여러 세대에 걸쳐 벼슬길에 오른 인물이 이어졌다는 건, 그만큼 학문을 중요하게 여긴 가문의 분위기가 있었다는 뜻으로 읽을 수 있어요. 수암서원은 이 다섯 분을 한자리에 모심으로써, 개인의 업적을 넘어 한 집안이 쌓아온 학문의 전통 전체를 기리고 있는 셈이에요.

사당 안에 들어서면 이 다섯 분의 위패가 나란히 모셔져 있는 모습을 직접 확인할 수 있어요.

한 집안의 글공부가 다섯 개의 이름으로 남았어요

다섯 분의 이야기를 알고 나면, 이제 서원 자체가 겪어온 세월이 궁금해질 차례예요. 수암서원도 조선 후기의 격변을 피해가지 못했거든요.

철폐와 복원, 수암서원이 건너온 시간

수암서원
수암서원

수암서원은 세워진 뒤로도 평탄하게만 이어지진 않았어요. 고종 5년, 1868년에 흥선대원군이 전국의 서원을 정리하는 서원철폐령을 내리면서 수암서원도 문을 닫아야 했어요. 당시 전국의 수많은 서원이 같은 운명을 겪었다는 건 역사를 조금만 공부해도 알 수 있는 사실이에요.

수암서원 역시 그 흐름을 피해가지 못하고 한동안 자리를 비워야 했던 거예요.

문을 닫은 뒤로도 다섯 분을 기리는 마음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던 것 같아요. 1901년에는 임시로 단을 세워 제사를 이어갔다고 전해지고, 이후 1919년에 이르러서야 지금의 모습으로 다시 복원이 이루어졌어요. 철폐부터 복원까지 따지면 반세기가 넘는 시간이 걸린 셈이니, 그 사이에도 다섯 분을 기억하려는 노력이 꾸준히 이어졌다는 걸 짐작할 수 있어요.

지금 우리가 보는 수암서원은 그렇게 긴 시간을 돌아 다시 자리를 잡은 모습이에요.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은 당시 서원이 지방 재정에 부담을 주고 붕당의 근거지가 된다는 이유로 내려진 조치였다는 건 비교적 널리 알려진 역사예요. 전국적으로 수많은 서원이 이때 문을 닫았고, 이후 다시 복원된 곳은 일부에 그친다는 점에서 수암서원처럼 다시 세워진 경우는 그만큼 지역에서 복원 의지가 강했다는 뜻으로 볼 수 있어요. 이런 배경을 알고 찾아가면, 지금 눈앞의 건물이 단순한 옛 건축물이 아니라 한 번 끊겼다가 다시 이어진 기억이라는 게 다르게 다가올 거예요.

체크리스트
사당
강당
내삼문
외삼문

이 네 가지를 미리 알고 가면, 경내를 둘러볼 때 어디가 어떤 공간인지 훨씬 쉽게 눈에 들어올 거예요. 이제 그 구성을 하나씩 좀 더 자세히 짚어볼게요.

사당과 강당, 경내는 이렇게 둘러보면 좋아요

수암서원 경내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건물은 사당이에요. 이선제를 중심으로 좌우에 나머지 네 분의 위패를 모시고 있어서, 안에 들어서면 다섯 분이 한자리에 모셔진 모습을 볼 수 있어요. 건물 규모는 앞면 3칸, 옆면 1칸 반 정도로 크지 않은 편이고, 지붕은 옆에서 보면 사람 인 자 모양을 이루는 맞배지붕으로 꾸며져 있어요.

맞배지붕은 조선시대 사당 건축에서 자주 볼 수 있는 형식이니, 다른 서원이나 사당을 다녀본 적이 있다면 낯설지 않은 모습일 거예요.

사당과 함께 자리한 강당은 교육 장소이자 유림, 즉 지역 유생들이 모이는 회합 장소로 쓰였던 공간이에요. 서원이 단순히 제사만 지내는 곳이 아니라 학문을 가르치고 사람들이 모여 의견을 나누는 곳이었다는 걸 이 강당 하나로도 짐작할 수 있어요. 지금 둘러볼 때도 사당만 보고 지나치지 말고, 강당까지 함께 살펴보면 서원이 가졌던 두 가지 역할, 추모와 교육을 같이 느껴볼 수 있어요.

경내로 들어가는 문도 눈여겨볼 만해요. 바깥쪽에서 들어가는 외삼문을 지나면 다시 안쪽의 내삼문을 지나야 사당과 강당이 있는 중심 공간에 닿을 수 있는 구조예요. 이렇게 문을 여러 겹 두는 방식은 제사 공간의 격식을 갖추기 위한 것으로, 바깥에서부터 차근차근 안으로 들어가며 공간의 위계를 느껴볼 수 있어요.

외삼문, 내삼문, 강당, 사당 순서로 천천히 둘러보면 수암서원이 품고 있는 구성을 자연스럽게 한눈에 담을 수 있을 거예요.

Cityzine 팁
수암서원은 연중무휴로 운영되고, 이용 시간은 09:00~18:00예요. 주차는 가능하지만 유모차 대여는 되지 않고 신용카드 결제도 어려우니 현금을 챙겨가면 좋아요. 자세한 사항은 방문 전 관리사무소(061-432-5278)로 전화해 확인해보는 걸 추천해요.
다섯 분의 이야기를 품은 조용한 서원, 천천히 걸으며 그 세월을 느껴보세요 🙂
글 · Cityzine 편집부 · 2026-10-06 발행링크 복사공유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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