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웹진›효자 정엄의 효심을 새긴 돌, 정엄정려비
Spot Light광주 웹진 · 광주 인사이드 · 2026-10-11 · 읽는 시간 7분

효자 정엄의 효심을 새긴 돌,
정엄정려비

조선 후기 효자 정엄의 사연을 담은 석조 정려비와 정려각을 광주 남구에서 만나보세요

효자 정엄의 효심을 새긴 돌, 정엄정려비
광주 현지 사진

광주 남구 서서평길에 자리한 정엄정려비는 조선 후기 효자로 이름난 정엄을 기리는 석조 정려비와 정려각이에요. 돌로 세운 비석 한 기와 그 비석을 감싸는 작은 각이 전부인, 비교적 조용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 곳이지요. 효자 한 사람의 이야기가 돌에 새겨져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는 점에서, 지나는 길에 한 번쯤 들여다볼 만한 곳이에요.

큰 규모의 관광지는 아니지만, 그만큼 오히려 차분하게 역사 이야기를 들여다보기 좋은 자리라고 할 수 있어요.

서서평길에서 찾아가는 정엄정려비

정엄정려비
정엄정려비

정엄정려비의 주소는 전남광주통합특별시 남구 서서평길 24로 안내돼 있어요. 광주 남구는 광주광역시 남쪽에 자리한 자치구로, 도심 생활권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곳에 여러 역사 유적과 비석들이 흩어져 있는 편이에요. 정엄정려비도 그런 자리 가운데 하나로, 길 이름을 따라가면 비교적 수월하게 찾아갈 수 있는 위치에 있다고 해요.

분류상으로는 관광지로 묶여 있지만, 실제로는 조용한 비석과 각이 전부인 소박한 역사 현장이라고 보면 돼요.

다만 이용정보를 보면 주차가 불가능하다고 안내돼 있어서, 차로 움직이신다면 미리 주변 사정을 확인해보시는 게 좋아요. 대중교통이나 도보로 접근하는 구체적인 방법은 따로 명시돼 있지 않으니, 방문 전에 지도 서비스나 전화 문의로 한 번 더 확인해보시길 권해요. 이런 작은 역사 현장은 큰 안내판 없이 조용히 자리한 경우가 많아서, 길을 나서기 전에 위치를 정확히 짚어두는 게 헛걸음을 줄이는 방법이에요.

정엄정려비는 상시 개방, 연중무휴로 운영된다고 안내돼 있어서, 날짜나 시간에 크게 구애받지 않고 들를 수 있다는 점은 다행이에요. 다만 정려각이라는 작은 구조물 하나를 돌보는 곳이라, 매표소나 안내소 같은 방문객 편의시설은 기대하기 어려운 편이에요. 가볍게 둘러보고 지나가는 코스로 생각하고, 근처에 다른 일정이 있을 때 함께 들러보는 방식으로 계획을 짜시면 좋을 것 같아요.

비석 하나에도 한 사람의 평생이 새겨질 수 있다는 걸, 정엄정려비 앞에서 새삼 느끼게 돼요.

정려비와 정려각, 돌에 담긴 모습

정엄정려비
정엄정려비

정엄정려비는 2단으로 쌓은 받침, 즉 좌대 위에 비몸을 세운 구조예요. 비석의 머리 부분인 비머리는 종 모양으로 변형된 운문, 구름무늬를 조식해 장식했고, 이 비머리는 비몸과 같은 돌로 만들어졌다고 해요. 하나의 돌을 깎아 몸체와 머리를 함께 표현한 방식이어서, 비석 전체가 통일된 느낌을 주는 구조라고 볼 수 있어요.

받침부터 머리까지 이어지는 흐름을 천천히 눈으로 따라가 보는 것도 이 비석을 감상하는 한 가지 방법이에요.

이 비석을 보호하기 위해 사방에 석조 기둥을 세워 정려각을 만들었어요. 나무가 아니라 돌기둥으로 둘러싼 각이라는 점이 특징인데, 세월이 지나도 비교적 단단하게 비석을 지켜줄 수 있는 구조라고 할 수 있어요. 정려각이라는 이름처럼, 이 작은 건축물 전체가 정엄의 효행을 기리는 상징으로 세워진 셈이에요.

비석과 각이 한 세트로 묶여 있는 모습을 함께 보면, 왜 이곳이 단순한 비석 하나가 아니라 하나의 기념 공간으로 여겨지는지 이해하기 쉬워져요.

정려각 안에는 비석과 함께 충견, 즉 주인을 향한 충성스러운 개와 관련한 설화가 전해지고 있어요. 그리고 정려각 곁에는 돌로 만든 개의 형상인 석구상이 놓여 있다고 해요. 어떤 사연으로 개 이야기가 함께 전해지게 됐는지 궁금해지는 부분인데, 정확한 유래까지는 공식 설명에 자세히 나와 있지 않으니 그 자체로 전해지는 이야기로 받아들이면 좋을 것 같아요.

비석 앞에 서면 이 설화를 떠올리며 석구상도 함께 찾아보시길 권해요.

1611국가가 정려를 명한 해

효자 정엄, 어떤 삶을 살았을까

정엄정려비
정엄정려비

정엄은 1558년에 문과에 급제한 뒤 승정원 동부승지라는 자리까지 지낸 인물이에요. 조선시대 승정원은 왕명을 받들고 전달하는 중요한 기관이었던 만큼, 동부승지 역시 가볍지 않은 직책이었다는 걸 짐작할 수 있어요. 관직 생활과 함께 그가 특히 이름을 남긴 부분은 바로 어머니를 향한 효성이었다고 해요.

벼슬길에 오른 인물이면서도 집안의 어버이를 살피는 일에 소홀하지 않았다는 점이 눈에 들어와요.

공식 설명에 따르면 정엄은 모친을 섬기는 데 효성을 다했고, 어머니가 병환 중일 때는 밤에도 옷을 벗지 않고 곁에서 간병했다고 전해져요. 자식이 부모를 돌보는 방식 중에서도 이렇게 밤낮으로 자리를 지킨 이야기는 당시에도 특별한 효행으로 여겨졌을 거예요. 이런 모습이 훗날 국가가 그를 기리는 이유가 됐다고 볼 수 있어요.

바쁜 관직 생활 틈에도 병든 어머니 곁을 지켰다는 사실만으로도, 그의 효심이 어느 정도였는지 가늠해볼 수 있어요.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정엄은 장례 절차를 성대히 치렀지만, 슬픔을 이기지 못해 병을 얻었고 결국 세상을 떠났다고 전해져요. 효심이 지나쳐 스스로의 건강까지 해친 셈인데, 이런 사연이 더해지면서 정엄의 효행은 더 깊은 울림으로 전해지게 된 것 같아요. 관직에 몸담았던 인물이 가족 앞에서는 한없이 애틋했던 모습을 엿볼 수 있는 이야기예요.

효자 한 사람의 생애가 이렇게 비석 하나에 압축돼 전해진다는 것도 새삼 생각해볼 만한 부분이에요.

체크리스트
2단 받침 위에 세운 비몸
종모양으로 조식된 비머리
사방을 두른 석조 기둥 정려각
정려각 곁의 석구상

국가가 명한 정려, 그리고 오늘의 모습

정엄의 효성을 기리기 위해 1611년, 국가에서 정려를 명했다고 해요. 정려란 효자나 충신, 열녀 등의 행실을 기리기 위해 나라에서 내리는 일종의 공식 표창 같은 제도로, 그 사람의 집이나 마을 앞에 비석과 각을 세워 오래도록 기억하게 하는 방식이었어요. 정엄정려비 역시 그렇게 세워진 상징물 가운데 하나인 셈이고, 1558년 문과 급제부터 1611년 정려까지, 한 사람을 둘러싼 시간의 흐름을 비석 하나로 가늠해볼 수 있어요.

시간이 흐르면서 정려각은 퇴락, 즉 낡고 허물어지는 상태에 이르렀다고 해요. 그러다 1975년에 이르러 지금과 같은 석조 형태로 다시 세워졌다고 전해져요. 처음 세워졌을 때부터 지금의 모습까지, 정엄정려비는 한 번의 재건을 거치며 오늘날까지 그 자리를 지켜온 셈이에요.

조선 후기에 세워진 정려가 20세기 중반 다시 손길을 거쳐 지금 우리가 볼 수 있는 모습으로 남아 있다는 사실도 흥미로운 부분이에요.

이용정보의 heritage 항목이 모두 0으로 표시돼 있는 걸 보면, 정엄정려비가 별도의 국가 문화재 지정번호를 갖고 있지는 않은 것으로 보여요. 그렇다고 해서 이 비석이 담고 있는 이야기의 무게가 가벼워지는 건 아니에요. 지정 여부와 상관없이, 한 사람의 효행과 그걸 기리려 한 국가의 뜻이 돌 위에 그대로 남아 있다는 점이 정엄정려비를 특별하게 만들어주는 것 같아요.

지정 문화재가 아니라서 오히려 덜 알려진, 그래서 더 차분히 둘러볼 수 있는 곳이라고 생각하셔도 좋을 것 같아요.

Cityzine 팁
정엄정려비는 상시 개방이고 연중무휴로 운영돼요. 다만 주차 공간은 따로 마련돼 있지 않고, 유모차 대여나 신용카드 결제도 지원되지 않으니 미리 참고하시고, 자세한 안내가 필요하면 062-607-2332로 문의해보세요.
조용한 돌 비석 하나에도 이렇게 깊은 이야기가 담겨 있다니, 지나는 길에 꼭 한 번 들여다보세요 🙂
#정엄정려비#남구#관광지#효자#정려각
글 · Cityzine 편집부 · 2026-10-11 발행링크 복사공유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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