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광조 제자가 세운 강학당,
김기서강학당
기묘사화 이후 은거한 김기서가 후진 양성을 위해 세운 조선 전기 강학당 이야기예요

전북 고창군 고수면, 조산저수지로 가는 길목의 축령산 자락이 이어지는 마을에 김기서강학당이 자리하고 있어요. 조선 전기에 세워진 이 강학당은 광산김씨 사당인 노산사 안에 있는데, 기묘사화를 겪은 한 선비가 스승의 뜻을 이어 후진 양성을 위해 세운 공간이라고 해요. 조광조의 제자였던 김기서가 사화 이후 은거하면서 마련한 자리인 만큼, 건물 한 채에 조선 전기 사림 정치의 흐름과 한 개인의 학문에 대한 마음이 함께 담겨 있는 셈이에요.
지금부터 김기서강학당이 어떤 자리에 있고, 김기서는 어떤 사람이었으며, 건물은 지금 어떤 모습으로 남아 있는지 차례로 짚어볼게요.
위치와 찾아가는 길
김기서강학당은 전북특별자치도 고창군 고수면 사동길 40-160에 자리하고 있어요. 조산저수지로 가는 길목의 축령산 자락이 이어지는 마을 안에 있다고 하니, 저수지 방향을 기준 삼아 길을 찾아가면 도움이 될 거예요. 고수면은 전북특별자치도 고창군에 속한 지역으로, 마을 안쪽까지 들어가야 강학당을 만날 수 있다고 해요.
고창군은 선사시대 고인돌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여러 시대의 유적이 함께 남아 있는 지역으로 잘 알려져 있는데, 김기서강학당도 그런 켜켜이 쌓인 역사 가운데 조선 전기의 한 자락을 보여주는 장소라고 할 수 있어요.
김기서강학당은 따로 떨어져 있는 건물이 아니라, 광산김씨의 사당인 노산사 안에 자리하고 있어요. 그래서 강학당만 보고 나오기보다는 노산사와 함께 둘러보게 되는 구조라고 생각하면 좋아요. 지금도 광산김씨 종중에서 이 공간을 관리하고 있다고 하니, 후손들이 오랜 시간 지켜온 자리라는 것도 함께 알아두면 좋겠어요.
사당과 강학당이 한 공간에 함께 있는 구성은 조상을 모시는 일과 후학을 기르는 일을 한자리에서 이어가려 했던 문중의 뜻이 담긴 배치라고 볼 수 있어요.
스승의 학문을 잇기 위해, 은거한 선비가 마을 한켠에 세운 배움터예요.
정확한 위치를 확인하고 싶다면 방문 전에 '전북특별자치도 고창군 고수면 사동길 40-160'이라는 주소로 검색해보는 게 가장 정확해요. 조산저수지를 기준으로 길을 잡고 축령산 자락 마을 쪽으로 들어가면 자연스럽게 닿을 수 있는 자리라고 하니, 이동 경로를 미리 그려보고 출발하면 편할 거예요. 마을 안쪽 길이라 내비게이션에 주소를 정확히 입력하고 움직이는 편이 헤매지 않는 방법이에요.
주차가 가능하다고 하니, 차로 이동해서 마을 어귀에 차를 세워두고 천천히 걸어 들어가는 것도 좋은 방법이에요.
김기서라는 인물
강학당의 이름이기도 한 김기서는 광산김씨 집안 사람으로, 자는 시견, 호는 돈목재였다고 해요. 성균관 직강을 지내고 통정대부까지 오른 매산 김석원의 조카였다고 하니, 학문을 가까이서 접할 수 있는 집안 환경에서 자랐다고 짐작해볼 수 있어요. 조선시대에 성균관 직강은 유생들을 가르치는 자리였고 통정대부는 정삼품 상계에 해당하는 품계였다고 알려져 있으니, 숙부인 김석원 역시 학문과 벼슬 양쪽에서 인정받은 인물이었다고 볼 수 있어요.
이런 집안에서 자란 김기서에게 학문은 자연스럽게 삶의 중심에 놓인 일이었을 거예요.
김기서는 효성이 지극한 인물로 전해져요. 1508년에는 그 효행을 인정받아 중종으로부터 광릉 참봉에 제수되고 장려를 받았다고 해요. 조선시대에 효행으로 관직에 제수되는 일은 나라로부터 특별한 인정을 받은 것이라고 볼 수 있고, 그만큼 김기서의 효행이 주변에 널리 알려져 있었다는 뜻이기도 해요.
광릉 참봉은 능을 관리하는 자리였다고 하니, 젊은 시절 김기서가 나라의 인정을 받으며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는 사실도 함께 기억해두면 좋겠어요.
이후 김기서는 조광조의 문하에 들어가 학문을 이어갔다고 전해져요. 매형인 양팽손 등과 함께 강론을 나누며 교유했다는 기록도 남아 있는데, 이 시기의 경험이 훗날 김기서강학당을 세우는 밑바탕이 되었다고 볼 수 있어요. 조광조는 조선 중종 때 개혁 정치를 이끌었던 인물로 널리 알려져 있는데, 그 문하에서 배운 김기서 역시 스승의 개혁적인 학풍에 큰 영향을 받았을 거예요.
관직보다 학문에 마음을 둔 선비들이 조광조 주변에 모여들었던 당시 분위기 속에서, 김기서도 그 흐름 안에 있었던 셈이에요.
조광조 문하와 기묘사화, 그리고 은거
김기서의 삶에서 빼놓을 수 없는 사건이 바로 1519년, 중종 14년에 일어난 기묘사화예요. 이 사건으로 스승인 조광조를 비롯한 신진사림들이 대거 숙청당했다고 해요. 조광조 문하에서 함께 학문을 익히던 김기서에게도 이 사화는 삶의 방향을 바꾸는 큰 사건이었을 거예요.
기묘사화는 조광조가 추진하던 개혁 정치에 반발한 훈구세력에 의해 신진사림이 대거 축출된 사건으로 잘 알려져 있는데, 그 여파는 조광조 개인을 넘어 그의 문하에서 배우던 이들에게까지 두루 미쳤던 셈이에요.
기묘사화 이후 김기서는 상평리에 은거하며 두문불출했다고 전해져요. 스승과 동료들이 화를 입는 것을 지켜본 뒤, 관직이나 세상일과 거리를 두고 조용히 지내는 쪽을 택한 셈이에요. 사화를 겪은 뒤 낙향하거나 은거하는 길을 택한 사림들이 많았던 시대적 흐름과도 맞닿아 있는 선택이라고 볼 수 있어요.
스승이 화를 입는 것을 가까이서 지켜본 제자가 세상일에서 물러나 조용히 학문에만 전념하기로 마음먹는 일은, 조선시대 사화를 다룬 여러 기록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흐름이기도 해요.
은거 이후에도 김기서는 조광조의 학문에 깊이 심취해 있었다고 해요. 그리고 후진을 양성하는 데 전념하고자 김기서강학당을 세웠다고 전해지는데, 스승의 뜻을 이어 다음 세대를 가르치는 일에 마음을 쏟았다는 걸 짐작할 수 있어요. 관직에서 물러난 뒤에도 학문을 놓지 않고 강학당까지 세워 제자를 기른 일은, 김기서에게 학문이 단순한 개인의 성취가 아니라 다음 세대로 이어가야 할 몫이었다는 걸 보여주는 대목이라고 할 수 있어요.
건물의 모습과 오늘날
지금 남아 있는 김기서강학당 건물은 1548년, 명종 3년 무렵 지어진 것으로 추정된다고 해요. 원래 이 자리에는 전불사라는 절의 불당이 있었다고 하니, 불교 사찰의 터가 유교 강학당으로 바뀐 자리인 셈이에요. 시대의 흐름에 따라 같은 자리가 다른 용도로 쓰이게 된 사례라고 볼 수 있어요.
조선이 유교를 나라의 근본으로 삼으면서 곳곳의 불교 사찰 터가 서원이나 강학당 같은 유교 시설로 바뀐 경우가 적지 않았다고 알려져 있는데, 김기서강학당 역시 그런 시대적 변화를 함께 보여주는 자리라고 할 수 있어요.
건물의 규모는 정면 5칸, 측면 2칸으로, 단층 팔작지붕을 얹은 기와집이라고 해요. 내부는 베갯마루로 이루어진 대청인 중당이 2칸, 좌협실이 2칸, 우협실이 1칸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하니, 가운데 넓은 마루를 두고 양옆으로 방을 배치한 구조라고 이해하면 좋아요. 팔작지붕은 지붕의 옆면까지 맞배와 우진각을 함께 쓴 모양으로, 한옥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지붕 형태 가운데 하나라고 알려져 있어요.
중당을 가운데 두고 양옆에 협실을 배치한 구성은, 여럿이 모여 강학하기에 알맞은 짜임새였을 거예요.
이런 구성은 조선 초기의 소박한 공청건물, 그러니까 공적인 용도로 쓰인 건물의 특징을 보여준다고 해요. 화려한 장식보다는 학문을 익히고 가르치는 본래 목적에 충실한 짜임새라고 볼 수 있고요. 지금까지도 광산김씨 종중에서 이 건물을 관리해오고 있다고 하니, 오랜 시간 후손들의 손길이 이어져 온 공간이라는 것도 기억해두면 좋겠어요.
문중에서 대를 이어 관리해온 덕분에, 조선 전기에 지어진 이 소박한 강학당이 지금까지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셈이에요.
조광조 문하에서 배운 선비가 은거 끝에 후진을 가르치려 세운 자리, 노산사와 함께 천천히 둘러보고 오세요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