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주 웹진영주 인사이드 · 2026-09-08 · 읽는 시간 2분

단종의 복위를 꿈꿨던 왕자,
금성대군을 기리다

조선 초 역사의 비극을 담은 사적 제491호

단종의 복위를 꿈꿨던 왕자, 금성대군을 기리다
영주 현지 사진

경상북도 영주시 순흥면에 자리한 금성대군 신단은 사적 제491호로 지정된 곳이에요. 이곳은 단순한 역사 유적이 아니라, 조선 초 가장 비극적인 정치 투쟁의 흔적을 품고 있습니다. 세종 임금의 여섯째 아들인 금성대군과 그를 따랐던 의사들의 넋을 기리는 곳이죠.

권력 투쟁의 소용돌이 속으로

신단의 제단 영역
신단의 제단 영역

조선 세조 원년인 1455년, 수양대군이 어린 단종 임금의 왕위를 빼앗아 버렸어요. 이 사건 이후 단종의 복위를 꿈꾸던 이들이 나타났고, 금성대군도 그중 한 명이었습니다. 금성대군은 먼저 삭령으로, 그 다음 광주로 유배를 가게 되었어요.

하지만 1456년 성삼문, 박팽년 등 사육신의 복위 운동이 실패로 돌아가자, 금성대군은 이에 연루되었다는 누명으로 다시 순흥으로 유배되었습니다.

순흥에서 금성대군은 당시 부사였던 이보흠과 뜻을 같이했어요. 둘은 함께 단종 복위를 위한 거사를 준비하기 시작했습니다. 격문을 지어 사람들을 모으고, 군비를 마련하고, 무기를 준비하는 일이 진행되었어요.

영월에 유배되어 있던 단종을 복위시키려는 계획이 차근차근 무르익어 가고 있었던 거예요.

비극적인 결말

역사를 기리는 공간
역사를 기리는 공간

세조 3년인 1457년 가을, 안타깝게도 이 계획은 실패로 끝났습니다. 누군가의 밀고로 세조의 관군이 순흥을 습격하게 된 거예요. 금성대군과 이보흠, 그리고 이들을 따랐던 의사들이 저항했지만, 결국 순흥 고을은 전화(戰火)의 소용돌이에 휩싸여 버렸습니다.

순흥은 폐부되었고, 금성대군은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하게 되었죠.

이후 200여 년이 흐른 숙종 9년인 1683년, 순흥의 명예가 회복되었어요. 그리고 숙종 45년인 1719년, 지역 유생 이기륭이 당시 부사 이명희에게 알려 단소(壇所)가 설치되기에 이릅니다. 영조 18년인 1742년에는 경상감사 심성희의 건의로 신단이 정비되었고, 금성대군의 위(位)와 이보흠의 위, 그리고 무명의 의사들의 위를 모시게 되었습니다.

도시전설 팁
정확한 방문 시간과 현지 안내에 대해서는 방문 전에 영주시 관광 정보나 순흥면 안내처로 확인해보세요. 조선시대 역사 유적이니 만큼 방문 시 주변 환경을 소중히 해주시기를 부탁해요.
권력을 탐하지 않고 정의를 추구했던 인물들을 기억하는 공간. 금성대군 신단을 통해 영주의 역사적 무게를 느껴봅니다.
#사적491호#금성대군#영주역사#조선시대#단종복위운동
글 · 도시전설 편집부 · 2026-09-08 발행링크 복사카카오톡 공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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