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현단 이야기,
사실은 귤림서원에서 시작됐어요
충암묘와 장수당이 하나로 어우러진 조선시대 서원, 유배와 교육 그리고 복원의 이야기를 담은 제주시 이도일동 귤림서원

안녕하세요, 귤이예요. 예전에 귤이가 제주시 시내에 자리한 오현단 이야기를 들려드린 적이 있었죠. 조선시대 제주로 유배를 오거나 관직을 지낸 다섯 유학자를 기리는 제단이라고 소개해드렸었는데요, 사실 그 오현단 바로 곁에는 이 이야기의 뿌리라고 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자리가 있어요.
바로 귤림서원이에요. 이름은 낯설게 느껴지실 수 있는데, 제사를 지내는 충암묘와 학생들을 가르치던 장수당이 함께 어우러져 이루어진 서원이라고 알려져 있어요. 오늘은 이 귤림서원이 어떻게 시작되어 지금의 모습에 이르렀는지, 그 긴 이야기를 천천히 풀어드릴게요.
충암묘와 장수당, 두 얼굴을 가진 서원이라고 해요
귤림서원은 제사 기능을 가진 충암묘와 교육 기능을 가진 장수당이 복합되어 이루어진 서원이라고 알려져 있어요. 하나의 건물이 아니라 넋을 기리는 사당과 학문을 가르치던 공간, 이 두 가지 성격이 한자리에 겹쳐 있다는 뜻인데요, 그래서인지 귤림서원 이야기를 들여다보면 단순히 오래된 교육 시설 하나를 소개하는 걸 넘어서, 제주에 유배 온 한 선비의 넋을 기리려던 마음에서 시작해 후학을 가르치는 자리로까지 이어진, 꽤 긴 흐름을 함께 따라가게 되더라고요.
이 이야기의 시작은 1578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고 전해져요. 당시 제주판관이었던 조인후라는 분이, 기묘사화로 제주도에 유배되었다가 사사된 김정이라는 인물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그가 귀양살이하던 적거지에 사묘를 세운 것이 귤림서원의 출발점이라고 알려져 있어요. 오현단 이야기를 해드릴 때도 유배 온 유학자들이 낯선 섬 땅에서도 뜻을 놓지 않았다고 말씀드렸었는데, 김정이라는 분의 사연이 바로 그 이야기의 한가운데 있는 셈이에요.
제사를 지내는 자리에서 시작해 후학을 가르치는 서원으로까지 이어졌다는 이야기를 들으니, 이곳에 쌓인 시간이 예사롭지 않게 느껴지더라고요.
장수당이 세워지고, '귤림서원'이라는 이름을 얻기까지
그로부터 한참 뒤인 1660년, 제주목사로 있던 이괴라는 분이 장수당을 건립했다고 알려져 있어요. 장수당은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육 공간이었다고 전해지는데, 이때까지만 해도 김정을 기리는 사묘와 장수당은 각각 따로 있었던 셈이에요. 그러다 1667년, 제주판관 최진남이 김정의 사묘를 장수당 남쪽, 그러니까 지금의 오현단 자리로 옮겨 지었다고 해요.
그렇게 사당은 '사'로, 장수당은 '재'로 삼아 한데 묶고, 여기에 '귤림서원'이라는 현판을 내걸면서 비로소 귤림서원이라는 이름이 생겨났다고 전해집니다.
이름을 얻은 뒤에도 이야기는 계속 이어져요. 1682년, 신경윤이라는 분이 제주목사로 있을 때 예조정랑 안건지를 제주도로 파견해서 귤림서원으로 사액을 받았다고 알려져 있어요. 사액이라는 건 임금이 직접 서원의 이름을 내려주는 일이니, 그만큼 이곳이 공식적으로 인정받는 자리가 됐다는 뜻이겠죠.
이때 김정, 송인수, 김상헌, 정온 이렇게 네 분의 유학자를 봉향했다고 전해져요.
그리고 1696년, 이익태 절제사가 있던 시기에 송시열이 추향되면서 다섯 분을 함께 배향하게 됐다고 알려져 있어요. 이 다섯 분이 바로 오현단이 기리는 '오현'과 이어지는 분들인 셈이에요.
서원 철폐, 그리고 다시 이어진 이야기
그렇게 이어져 오던 귤림서원도 1871년 서원 철폐령에 의해 폐원되었다고 전해져요. 전국적으로 서원을 정리하던 흐름 속에서 귤림서원 역시 그 대상이 됐던 셈인데요, 오랜 세월 이어져 온 자리가 한순간에 문을 닫게 됐다는 이야기를 들으니 저도 마음 한켠이 아릿하더라고요.
하지만 이야기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어요. 1892년, 제주 사람 김의정이 중심이 되어 귤림서원 자리에 오현의 뜻을 후세에 기리고자 조두석을 세우고 제단을 쌓아 제사를 지냈다고 전해져요. 지금의 오현단이 바로 이 자리에서 이어져 온 흔적인 셈이니, 귤림서원과 오현단이 서로 다른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의 뿌리에서 갈라져 나온 이야기라는 걸 알고 나니 저도 새삼 두 곳을 함께 떠올리게 되더라고요.
2000년 이후에는 제주시가 귤림서원 복원 작업에 나섰다고 알려져 있어요. 학생들이 공부하던 장수당과 협문, 돌담 등을 차례로 완성했고, 이어서 2007년 8월에는 향현사 복원까지 마무리 지었다고 전해져요. 폐원된 지 130년 넘는 세월이 흐른 뒤에야 다시 옛 모습을 조금씩 되찾아온 셈이니, 이 자리가 품고 있는 시간이 꽤 길게 느껴지죠.
지난번 귤이가 오현단 이야기를 들려드렸을 때는 유배 온 유학자들의 넋을 기리는 제단이라고만 소개해드렸는데, 오늘 귤림서원 이야기를 알고 나니 그 뿌리가 훨씬 더 깊고 길다는 걸 알게 됐어요. 제사를 지내던 사묘에서 시작해, 학생들을 가르치던 장수당이 더해지고, 이름을 얻고 사액을 받고, 철폐되었다가 다시 복원되기까지 — 귤림서원은 그 하나하나의 시간이 겹겹이 쌓인 자리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제사 지내던 자리에서 시작해 학문을 가르치는 서원이 되고, 철폐되었다가 다시 복원되기까지 — 귤림서원이 품고 있는 시간을 오늘 귤이가 천천히 풀어드렸수다. 오현단 걸음 허실 때 귤림서원도 함께 떠올려주민 좋으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