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성 웹진›의병장 안방준의 학덕을 기리는 보성 대계서원
Spot Light보성 웹진 · 보성 인사이드 · 2026-09-25 · 읽는 시간 7분

의병장 안방준의 학덕을 기리는 보성 대계서원

숙종과 정조, 고종 대까지 훼철과 중건을 거듭한 사연 깊은 서원이에요

의병장 안방준의 학덕을 기리는 보성 대계서원
보성 현지 사진

전남광주통합특별시 보성군 보성읍 동암2길에 자리한 대계서원은 조선 중기 유학자 안방준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곳이에요. 임진왜란과 정묘·병자호란을 거치며 의병을 일으키고 격문을 띄웠던 한 학자의 삶이 이 서원 안에 고스란히 담겨 있어요. 이름은 낯설어도 지나온 이야기를 알고 나면 한 번쯤 발걸음을 옮겨보고 싶어지는 곳이에요.

특히 몇 백 년에 걸쳐 훼철과 중건을 거듭해온 이력이 있어서, 건물 하나하나에 조선 후기의 시대상이 겹겹이 쌓여 있다고 볼 수 있어요.

의병장이자 유학자, 안방준

대계서원
대계서원

대계서원에 위패가 모셔진 안방준은 1573년에 태어나 1654년까지 살았던 인물로, 호남을 대표하는 유학자로 알려져 있어요. 그가 스무 살이 되던 해에 임진왜란이 일어났고, 안방준은 박광전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나라를 지키는 데 나섰다고 해요. 조선시대 유학자들이 대개 글공부에 매진했던 것과 달리, 안방준은 위기가 닥치자 직접 몸을 움직여 행동으로 옮긴 인물이었던 셈이에요.

학문을 닦던 선비가 붓 대신 창을 들었던 순간이었다고 볼 수 있어요.

안방준의 행보는 임진왜란에서 그치지 않았어요. 이후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이 잇따라 벌어졌을 때도 그는 격문을 띄워 임금을 지키려는 의기를 높이 세웠다고 전해져요. 한 번의 의병 활동으로 끝나지 않고 나라에 위기가 닥칠 때마다 거듭 나섰다는 점에서, 그의 삶 전체를 관통하는 한 가지 태도를 엿볼 수 있어요.

세 차례에 걸친 전란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았던 태도가 후대에까지 전해질 수 있었던 이유이기도 해요.

이런 이력 때문에 안방준은 단순히 글을 잘 짓는 선비가 아니라, 학문과 실천을 함께 갖춘 인물로 후대에 기억되고 있어요. 지방 유림들이 그의 학문과 덕행을 오래도록 추모하고 싶어 했던 것도 이런 배경에서였다고 볼 수 있어요. 대계서원은 바로 그 마음이 모여 만들어진 공간이에요.

안방준이라는 이름은 낯설어도, 그가 남긴 행적을 알고 나면 대계서원을 바라보는 눈이 한층 깊어질 수 있어요.

학문을 갈고닦던 선비가 나라의 위기 앞에서는 주저 없이 붓을 내려놓았던 사람이었어요.

지방 유림의 뜻으로 세워진 서원

대계서원
대계서원

대계서원이 세워진 건 효종 8년, 그러니까 1657년의 일이에요. 지방 유림들이 뜻을 모아 안방준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서원을 창건하고 위패를 모셨다고 해요. 조선시대 서원이 대개 그렇듯, 이곳 역시 한 인물의 학덕을 기리는 동시에 지역 유학의 구심점 역할을 했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어요.

안방준이 세상을 떠난 지 채 몇 년 지나지 않아 지어졌다는 점에서, 그를 기리려는 지역민들의 마음이 얼마나 컸는지도 짐작해볼 수 있어요.

서원의 위상이 한 단계 더 높아진 건 숙종 30년인 1704년이에요. 이때 나라로부터 '대계'라는 이름을 사액 받으면서 사액서원으로 승격되었다고 해요. 사액서원은 임금이 이름을 지어 내리고 서적이나 토지 등을 지원해주던 서원을 가리키는데, 대계서원도 이런 대우를 받을 만큼 인정받는 자리였다는 뜻이에요.

지방에서 자발적으로 세운 서원이 중앙으로부터 이름까지 받게 되었다는 건, 그만큼 안방준의 행적과 학문이 널리 인정받았다는 증거이기도 해요.

서원 이름에 붙은 '대계'라는 두 글자에는 이렇게 국가가 공식적으로 그 가치를 인정했다는 역사가 담겨 있는 셈이에요. 지금 대계서원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이유도 여기에서 비롯된 것이고요. 이름 하나에도 이렇게 켜켜이 쌓인 시간이 있다는 걸 알고 나면 서원을 보는 시선이 조금 달라질 수 있어요.

1704년‘대계’ 이름으로 사액서원 승격

훼철과 중건을 거듭한 파란만장한 역사

대계서원
대계서원

대계서원의 역사는 순탄하지만은 않았어요. 숙종 17년인 1691년에 안방준을 모신 사우에 대한 훼철이 결정되었고, 이듬해인 1692년에는 능주의 도산사와 함께 실제로 훼철되고 말았다고 해요. 중앙의 정치적 상황에 따라 지방 서원의 존폐가 좌우되던 시대였다는 걸 짐작하게 하는 대목이에요.

세워진 지 30여 년 만에 사라질 위기를 맞았던 셈이니, 당시 유림들이 느꼈을 안타까움도 상당했을 거예요.

다행히 서원은 그대로 사라지지 않았어요. 훼철된 지 몇 년 지나지 않은 1695년, 숙종 21년에 다시 복설되면서 대계서원은 제자리를 되찾았다고 해요. 이후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1704년에 사액을 받아 위상이 높아졌지만, 시련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어요.

세워지고 무너지고 다시 세워지는 흐름이 이때부터 이미 반복되고 있었던 셈이에요.

정조 4년인 1780년에는 화재로 서원이 전소되는 일이 벌어졌고, 1784년이 되어서야 다시 중건될 수 있었어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고종 5년인 1868년,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따라 다시 한번 훼철되었는데 이때는 끝내 복원되지 못했다고 해요. 전국의 수많은 서원이 이 시기에 문을 닫았던 것처럼, 대계서원도 그 흐름을 피해가지 못한 셈이에요.

세워지고 무너지고 다시 세워지기를 반복한 대계서원의 역사를 따라가다 보면, 조선 후기 정치사의 흐름을 그대로 압축해서 보는 듯한 느낌을 받을 수 있어요.

체크리스트
훼철과 중건을 거듭한 서원의 역사 미리 알아두기
상시개방이지만 방문 전 안내 전화로 확인하기
주차 가능, 이동 경로는 미리 확인하기
유모차 대여·카드 결제 시설 없음 참고하기

찾아가기 전에 알아두면 좋은 것들

대계서원은 전남광주통합특별시 보성군 보성읍 동암2길 100에 자리하고 있어요. 보성 하면 흔히 푸른 차밭을 먼저 떠올리는 분들이 많지만, 보성읍 곳곳에는 이렇게 조선시대 유학의 흔적을 품은 공간들도 자리하고 있어요. 보성읍은 보성군의 중심 지역이라 이동하기에 크게 불편하지 않은 편이고, 주차도 가능하다고 안내되어 있으니 차로 이동하는 경우에도 부담이 덜할 거예요.

다만 구체적인 진입로나 주변 편의시설은 방문 전에 한 번 더 확인해보시는 게 좋아요.

앞서 살펴본 것처럼 대계서원은 1868년 훼철 이후 복원되지 못한 채 오늘에 이르고 있어요. 지금 남아 있는 모습이 처음 세워졌을 때나 사액서원으로 승격되었을 때의 모습과 같지 않을 수 있다는 점을 미리 알고 가시면, 현장에서 느끼는 인상이 조금 더 또렷해질 수 있어요. 오히려 그 훼철의 흔적 자체가 대계서원이 겪어온 역사를 실감 나게 보여주는 부분일 수도 있고요.

눈에 보이는 것보다 그 안에 쌓인 이야기에 더 마음을 두고 걸어보시는 것도 좋은 방법이에요.

이용시간은 상시개방으로 안내되어 있고 연중무휴로 운영된다고 하니, 특별히 날짜를 맞추지 않아도 찾아가 볼 수 있는 곳이에요. 다만 유모차 대여나 신용카드 결제와 같은 편의 시설은 마련되어 있지 않다고 하니, 이 부분은 미리 참고하고 방문 계획을 세우시면 좋겠어요. 궁금한 점이 있다면 안내 전화로 미리 문의해보는 것도 방법이에요.

Cityzine 팁
대계서원은 상시개방이라 연중무휴로 찾아가실 수 있고 주차도 가능해요. 다만 유모차 대여나 신용카드 결제 같은 편의시설은 없으니 미리 참고하시고, 궁금한 점은 보성군 문화관광 안내전화 061-850-5206으로 확인해보세요.
세워지고 무너지길 거듭했던 대계서원, 그 흔적을 따라 안방준의 발자취를 천천히 걸어보세요 🙂
#대계서원#보성읍#관광지#안방준#서원
글 · Cityzine 편집부 · 2026-09-25 발행링크 복사공유하기

함께 읽으면 좋은 이야기

더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