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성 남사당 바우덕이 묘,
역사를 바꾼 여 꼭두쇠의 기억
조선 말기 거리의 나그네, 안성 풍물의 거성(巨星)이 된 여인

안성 서운면 청용리의 조용한 묘지에 바우덕이의 무덤이 있어요. 본명은 김암덕, 생몰 연도는 1848년부터 1870년까지라고 해요. 23살의 짧은 삶이었지만, 한국 남사당 역사에 '유일무이한 여 꼭두쇠'로서 이름을 남긴 인물이에요.
조선 말기라는 혼란의 시대에, 그것도 가장 아래쪽 신분의 사람이 이루어낸 이 성취가 얼마나 특별한지, 그 묘를 찾아가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깊어요.
남사당의 모든 기예를 익힌 재능아
바우덕이는 어려서부터 특이한 인생을 살았어요. 구전에 의하면 5살 때 머슴으로 살던 아버지가 병으로 사망하자, 남사당패에 맡겨져 성장했다고 합니다. 거기서 염불, 소고춤, 줄타기 등 남사당의 모든 기예를 익혔어요.
어느 정도 실력을 갖추게 되자 그 이름을 모르는 이가 없었을 정도로 유명해졌다고 하니, 이 재능이 얼마나 뛰어났는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남사당의 기예는 여섯 마당으로 나뉘어요. 풍물놀이, 버나, 살판, 어름(줄타기), 덧뵈기(탈놀음), 덜미(꼭두각시놀음). 바우덕이는 이 모든 것을 익혔을 뿐 아니라, 각각을 구사하는 능력이 뛰어나서 당대의 명인으로 불렸던 거죠.
역사의 무게가 무너뜨린 별
조선 말기 고종 2년(1865), 흥선대원군이 경복궁 증수에 나섰어요. 공사에 동원된 인부들의 사기를 높이기 위해 전국의 남사당패를 불러모았다고 해요. 당시 안성 남사당패의 명성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흥선대원군 자신이 그들을 불러 무대를 펼치게 했던 것입니다.
이 무대에서 바우덕이 개다리패는 최고의 인기를 얻었고, 흥선대원군으로부터 옥관자기라는 옥관자를 하사받았대요. 당시로서는 정3품에 해당하는 깊은 존경의 표현이었던 거죠.
하지만 인생은 무대만큼 오래가지 못했어요. 23살의 나이에 폐병으로 사망했다고 전해집니다. 마지막에 그를 돌보던 이경화가 망인의 유지에 따라 청룡골 입구 양지 바른 곳에 매장했다고 알려져 있어요.
짧은 삶이었지만, 그 영향력은 깊고 오래갔습니다.
안성을 풍물의 고장으로 만들다
바우덕이의 개다리패가 유명해지자, 안성에는 복만이패, 원윤덕패, 이원보패 같은 많은 남사당패가 생겨났어요. 이로 말미암아 안성은 '풍물의 고장'이 되었습니다. 바우덕이 개인의 성공이 아니라, 그녀가 속한 패의 명성으로 인해 전체 지역이 변화한 거죠.
안성 남사당풍물놀이는 현재 경기도 무형문화재 제21호로 지정되어 있어요. 1997년 9월 30일의 일입니다. 전국민속경연대회에 출전해 대통령상도 받았다고 하니, 바우덕이가 닦아놓은 기틀이 현대까지 얼마나 견고했는지를 보여주는 증거라고 할 수 있어요.
잊혀졌던 이름을 되찾아
바우덕이는 이곳에 묻혀 있지만, 그의 공덕은 안성 남사당풍물놀이와 함께 길이 빛나고 있어요. 1990년에야 버려진 바우덕이 묘를 찾아내고 정화한 뒤 묘비를 세운 안성의 유지들의 노력이 없었다면, 이 역사가 완전히 잊혀졌을 수도 있었어요. 다행히 현재는 그 이름과 업적이 다시 기억되고 있답니다.
방문 전에 꼭 알아두세요
묘는 경기도 안성시 서운면 청용리 산 1-36에 위치하고 있어요. 조용한 시골의 묘지이니 방문할 때 경건한 마음가짐을 가져주세요. 이용요금이나 개방 시간 정보는 확인되지 않았으니, 방문 전에 안성시에 문의하고 적절한 시간대에 방문하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조선 말기 여 꼭두쇠의 묘 앞에서, 풍물이 울려 퍼지던 그 시대를 생각해보세요. 23년의 짧은 생이 남긴 역사의 울림이 들릴 것입니다.








